기타 최신값3,288
전년 대비 (원산 → 기타) 2,446명+290.5%
4년 누적 변화 (부산 → 기타) 5,722명-63.5%
기간 최고·최저
부산9,010명
원산842명

한눈에 보는 핵심 비교

1925년 개항 항구의 인구 분포: 부산·인천 중심의 항만 지역 통계 (명)
1925년 개항 항구의 인구 분포: 부산·인천 중심의 항만 지역 통계1925년 개항 항구의 인구 분포: 부산·인천 중심의 항만 지역 통계 값 비교 차트. 부산부터 기타까지의 5개 데이터 포인트. 최저 842명, 최고 9,010명, 평균 3,081명. 전체 흐름은 감소(-63.5%).02252.545056757.59010부산: 9,010명부산인천: 1,193명인천진남포: 1,072명진남포원산: 842명원산기타: 3,288명기타

출처: KOSIS 국가통계포털

차원별 시각화

성별 인구 구성 (명)
성별 인구 구성성별 인구 구성 값 비교 차트. 남부터 여까지의 2개 데이터 포인트. 최저 652명, 최고 14,753명, 평균 7702.5명. 전체 흐름은 감소(-95.6%).03688.37376.511064.814753남: 14,753명여: 652명

출처: KOSIS 국가통계포털

성별 비율 (%)
성별 비율성별 비율 비중 차트. 총 2개 항목 중 남이 95.8%로 가장 큰 비중. 상위: 남 95.8%, 여 4.2%.남: 95.8% (95.8%)여: 4.2% (4.2%)95.8% 4.2%

출처: KOSIS 국가통계포털

상세 데이터 표

1925년 개항 항구별 인구 (단위: 명)
항구인구
부산9,010
인천1,193
진남포1,072
원산842

출처: KOSIS 국가통계포털

성별 인구 현황 (단위: 명)
구분인구비율
14,75395.8%
6524.2%
합계15,405100.0%

출처: KOSIS 국가통계포털

자세한 해설

1925년 개항 항구는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경제 중심지였다. 개항 수면(항구 주변 지역)의 인구는 총 15,405명으로 집계되었다.

어느 항구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나요?

부산이 압도적이었다. 9,010명으로 전체의 58.5%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인천 1,193명, 진남포 1,072명, 원산 842명 등이 주요 항구였다. 이 네 항구만 해도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했다. 나머지 8개 항구(계약개방장)에는 3,288명이 흩어져 살았다.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많이 달랐어요.

맞다. 남성은 14,753명, 여성은 652명이었다. 남성이 95.8%를 차지하고 여성은 4.2%에 불과했다. 이는 항만의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항구에서는 무거운 짐을 옮기고 배를 수리하는 등 육체 노동이 주된 일이었다. 이런 일거리를 따라 남자 일꾼들이 대거 몰려왔던 것이다.

언제 이런 데이터를 기록했나요?

일제강점기 조선 인구총조사의 일부다. 1925년은 일본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통계 체계를 정비하던 시기였다. 당시 개항지는 일본 자본, 조선인 노동자, 중국 상인 등이 섞여 사는 국제 무역 거점이었다.

데이터 출처와 한계

이 통계는 1925년 일제강점기 인구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단일 시점의 통계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알 수 없다. 데이터 원본에는 국적(일본인/조선인/중국인 등)과 항구별 교차 분석 정보가 145개 행으로 존재하지만, 이 요약에서는 항구별과 성별 주요 수치만 제시했다. 당시 국적 분류 기준은 현대와 다르며, 조선 거주 일본인의 정의와 범위도 역사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있다.

자주 묻는 질문

1925년 개항 항구는 어디였나요?
부산, 인천, 진남포, 원산 등 총 12곳이 있었어요. 이 중 부산이 9,010명으로 가장 크고, 인천이 1,193명으로 두 번째였어요.
왜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많았나요?
항구는 짐을 싣고 내리고 배를 고치는 일들이 주요 일자리였어요. 이런 힘든 육체 노동을 하려고 남자들이 많이 몰려왔던 거예요.
국적별 인구 구성은 어떻게 됐나요?
1925년은 일제강점기여서 일본인과 조선인, 중국인이 함께 살았지만, 정확한 국적별 비율은 이 요약 자료에 담기지 않았어요.